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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찰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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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잭 찰턴은 잉글랜드의 축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선수 시절에는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며 1966년 FIFA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1967년 FWA 올해의 선수로 선정되었으며, 클럽에서 풋볼 리그 1부, 2부, FA컵, 풋볼 리그 컵, 인터 시티스 페어스 컵 등 다수의 우승을 경험했다.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는 35경기 6골을 기록했다. 감독으로서는 미들즈브러, 셰필드 웬즈데이, 뉴캐슬 유나이티드를 거쳐 아일랜드 공화국 대표팀을 맡아 UEFA 유로 1988 본선 진출, 1990년 FIFA 월드컵 8강, 1994년 FIFA 월드컵 16강을 달성하며 아일랜드 축구의 황금기를 열었다. 2005년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2020년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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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찰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69년의 잭 찰턴
1969년의 잭 찰턴
본명존 찰턴
출생일1935년 5월 8일
사망일2020년 7월 10일
출생지잉글랜드 노섬벌랜드주 애싱턴
사망지잉글랜드 노섬벌랜드 애싱턴
6 ft 1+1/2 in (187 cm)
포지션센터백
선수 경력
유소년 클럽리즈 유나이티드 (1950–1952)
클럽리즈 유나이티드 (1952–1973)
출장 (골)629 (70)
국가대표잉글랜드 (1965–1970)
국가대표 출장 (골)35 (6)
감독 경력
클럽미들즈브러 (1973–1977)
셰필드 웬즈데이 (1977–1983)
미들즈브러 (감독 대행) (1984)
뉴캐슬 유나이티드 (1984–1985)
아일랜드 (1986–1996)
국가대표 메달
FIFA 월드컵금메달: 1966 잉글랜드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3위: 1968 이탈리아
군 복무
소속영국군
군종기병대
복무 기간1953–1955 (국민 복무)
훈장

2. 선수 경력

1935년 5월 8일, 노섬벌랜드 애싱턴에서 축구 선수 집안에서 태어난[4] 찰턴은 동생 바비에게 가려졌다. 바비는 잭이 군 복무를 근위 기병대에서 하는 동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5] 찰턴의 삼촌으로는 잭 밀번, 조지 밀번, 짐 밀번, 스탠 밀번이 있었고, 뉴캐슬 유나이티드 선수 재키 밀번은 그의 어머니의 사촌이었다.[6]

15세 때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테스트를 제안받았지만,[10] 거절하고 아버지와 함께 광산에 들어갔다.[11] 잠시 광산에서 일했지만, 지하에서 일하는 것이 어렵고 불쾌하다는 것을 알고 사표를 냈다.[12] 경찰에 입대하기 위해 지원했고 리즈 유나이티드의 제안을 재고했다.[13] 리즈에서 치른 테스트 경기는 경찰 면접과 겹쳤고, 찰턴은 경기에 출전하기로 결정했다. 테스트는 성공적이었고 엘런드 로드의 그라운드 스태프로 합류했다.[14]

찰턴은 리즈 유나이티드 유스 팀에서 노던 인터미디에이트 리그, 요크셔 리그에서 뛰었다. 16세에 요크셔 리그에서 뛰는 모습은 구단 경영진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곧 리저브 팀으로 승격되었다.[15] 17세가 되자 첫 프로 계약을 맺었다.[16] 1953년 4월 25일 돈캐스터 로버스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다.[17] 1952–53 시즌 마지막 세컨드 디비전 경기였고, 1–1 무승부로 끝났다.[18] 이후 2년간 근위 기병대에서 군 복무를 했고, 하노버에서 열린 기병대 컵에서 호스 가드를 우승으로 이끌었다.[19] 군 복무는 리즈에서의 기여를 제한했고, 1954–55 시즌에 단 한 번 출전했다.[20]

찰턴은 1955년 9월에 1군으로 복귀했다. 셰필드 웬즈데이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리즈가 퍼스트 디비전으로 승격하는 데 기여하며 1955–56 시즌 동안 자리를 지켰다.[21] 1956–57 캠페인 후반기에 팀에서 제외되었는데, 늦은 밤까지 파티를 하고 축구에 집중하지 못하는 습관 때문이었다.[22] 1957–58 시즌에 다시 자리를 되찾았다.[23] 1957년 10월 잉글리시 풋볼 리그를 대표하여 아일랜드 리그와의 경기에 출전했다.[23]

리즈는 1958년 레이치 카터가 팀을 떠난 후 어려움을 겪었고, 1959–60 캠페인 말까지 리즈를 강등권에서 구하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찰턴은 코칭 자격증을 취득하기 시작했고 릴리셜에서 풋볼 어소시에이션 코칭 강좌에 참여했다.[24]

리즈는 1960–61 시즌 세컨드 디비전 강등권에서 단 5점 앞선 채 시즌을 마쳤고, 돈 레비는 유나이티드 1군에서 승격되었으며, 처음에는 찰턴을 좋아하지 않았다.[25] 레비는 1961–62 시즌 초반 찰턴을 최전방에 배치했지만, 센터 포워드로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곧 센터 하프로 다시 옮겼다.[25] 그는 좌절감을 느꼈고, 동생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큰 성공을 거두는 동안, 아무 성과 없이 팀에 머무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26] 레비는 1962년에 그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찰턴에게 말했지만, 이적 명단에 올리지 않았다.[27]

1962–63 시즌은 레비가 팀과 클럽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만들기 시작하면서 리즈 유나이티드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9월 스완지 타운과 경기에서 레비는 찰턴을 게리 스파이크, 폴 리니, 노먼 헌터와 찰턴, 로드 존슨으로 구성된 젊은 수비 라인업에 배치했다.[29] 존슨을 제외하면 이 수비 라인업은 10년 동안 대부분 일관성을 유지했다.[29] 찰턴은 수비를 맡아 지역 방어 시스템을 고집했고, 레비는 찰턴이 수비의 핵심 조직자가 되도록 허용했다. 자니 자일스의 도움을 받아 리즈는 강력한 승격 경쟁을 벌였고 1963–64 캠페인에서 선덜랜드보다 2점 앞선 선두를 차지하며 챔피언으로 승격하기 전에 5위를 기록했다. 빌리 브렘너, 폴 메이들리, 피터 로리머도 1군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29]

리즈는 최고 리그로 복귀 첫 시즌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팀은 거친 플레이로 명성을 얻었고, 찰턴은 자서전에서 "우리가 성공을 거둔 방식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30] 엘런드 로드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하기 전까지 25경기 무패를 기록했는데, 그들의 우승 경쟁은 두 클럽 사이에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게 했다.[31] 리즈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해야 우승을 확정할 수 있었지만, 버밍엄 시티와 세인트 앤드루스에서 3–3 무승부에 그쳤다. 찰턴은 86분에 동점골을 넣었다.[31] FA컵 준결승전 재경기에서 1–0으로 승리하며 맨 유나이티드에 대한 복수를 했다.[32] 리즈는 웸블리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만났고, 경기는 득점 없이 연장전으로 돌입했다.[33] 로저 헌트는 연장전 3분 만에 선제골을 넣었지만, 7분 후 찰턴이 크로스를 헤딩으로 연결해 브렘너가 발리슛으로 동점골을 넣었다. 7분이 남았을 때 이언 세인트 존이 리버풀을 위해 득점하여 2–1로 승리했다.[33]

유나이티드는 1965–66 시즌에도 우승 경쟁을 벌여 리버풀에 이어 리그 2위를 기록했고, 인터 시티스 페어스컵 준결승에 진출했다.[34] 찰턴은 발렌시아와 경기에서 찰턴과 수비수 비다간이 싸움을 벌이면서 논란을 일으켰다.[35]

1966–67 시즌은 에디 그레이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나이티드에게 좌절스러운 시즌이었다.[36] 리즈는 4위를 기록하며, 챔피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5점 뒤졌고, 첼시에게 패배한 후 FA컵 준결승에서 탈락했다. 인터 시티스 페어스컵에서 DWS, 발렌시아, 볼로냐, 킬마노크를 꺾고 결승전에 진출했지만, 디나모 자그레브에게 2–0으로 패했다.[37] 시즌이 끝날 때 그는 형에 이어 FWA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되었다.[73]

찰턴은 1967–68 시즌에 새로운 전술을 개발했는데, 코너킥 때 골키퍼 옆에 서서 골키퍼가 공을 잡으러 나오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39] 두 시즌 연속 리즈는 4위를 기록했고, FA컵 준결승에서 탈락했는데, 올드 트래포드에서 에버턴에게 1–0으로 패했다. 리그 컵 결승전에서 아스날을 1–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테리 쿠퍼는 골을 넣기 전에 찰턴이 골키퍼 짐 퍼넬을 밀었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경기에서 유일한 골을 넣었다.[40] 리즈는 결승전에 진출하여 헝가리 클럽 페렌츠바로시를 만났다.[41] 엘런드 로드에서 1–0으로 승리했고 부다페스트에서 0–0으로 비기며 첫 번째 유럽 트로피를 차지했다.[40]

찰턴은 리즈가 1968–69 시즌 풋볼 리그 타이틀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는데, 단 두 경기만 패하며 2위 리버풀보다 6점 앞서 시즌을 마쳤다. 4월 28일 안필드에서 득점 없이 비기며 타이틀을 확정했고, 찰턴은 리버풀 서포터들이 그를 "큰 더러운 기린"이라고 불렀고, 빌 샹클리 감독이 경기가 끝난 후 리즈 라커룸에 들어와 그들이 "가치 있는 챔피언"이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42]

유나이티드는 1969–70 캠페인 자선 실드에서 2–1로 맨체스터 시티를 꺾고 시작했고, 트레블 – 리그, FA컵 및 유러피언컵을 우승할 수 있는 가능성에 직면했다.[44] 그러나 세 개의 트로피 모두를 놓쳤다. 리그 타이틀은 에버턴이 따라잡을 수 없는 리드를 구축하면서 먼저 미끄러져 나갔다.[44] 유러피언컵에서 셀틱에게 합산 스코어 3–1로 패했고, 136,505명 앞에서 햄던 파크에서 2–1로 패했다.[45] FA컵 준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기 위해 두 번의 재경기를 치렀지만, 재경기 결승전에서 첼시에게 2–1로 패했다. 찰턴은 재경기에서 피터 오스굿 골에 대해 책임을 졌다.[46]

찰턴은 1970–71 시즌 초반 타인 티스 축구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논란을 일으켰는데, 선수 시절에 그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복수할 의도로 선수들 이름을 적어 놓은 "작은 검은 책"이 있었다고 말했다.[47] 풋볼 어소시에이션에 의해 재판을 받았고, 언론이 그를 잘못 인용했다고 주장하면서 어떠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판결을 받았다.[48] 이름이 적힌 책은 없었지만, 그에게 거친 태클을 했던 선수들 이름을 머릿속에 적어두었고, 경기 중 기회가 된다면 그 선수들에게 힘들지만 공정한 도전을 가할 의향이 있었다고 인정했다.[49] 리즈는 시즌을 또 다시 2위로 마쳤다.[50] 최종 점수 64점은 2위를 기록한 팀의 최고 기록이었다.[51] 인터 시티스 페어스컵 마지막 시즌에 유벤투스와 결승 진출을 확정했다.[52] 스타디오 올림피코에서 2–2로 비겼고, 엘런드 로드에서 1–1로 비겨 원정 다득점 규칙에 따라 컵을 우승했다.[53] 바르셀로나에게 캄 노우에서 열린 트로피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2–1로 패했다.[3]

리즈는 1971–72 시즌 세 번째 연속 2위를 기록했고, 몰리뉴에서 울버햄튼 원더러스에게 패하면서 챔피언 더비 카운티보다 1점 뒤졌다.[54] 그러나 찰턴은 리즈가 FA컵 결승전에서 아스날을 1–0으로 꺾고 국내 우승 명단을 완성할 수 있었다. 찰리 조지를 조용한 경기로 만들었고, 리즈는 아슬아슬한 리드를 성공적으로 지켜냈다.[55]

찰턴은 1972–73 캠페인에서 25경기 출전에 그쳤고, 울브스와 FA컵 준결승에서 부상을 입어 시즌을 마감했다. 결승전에 출전할 몸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자 은퇴를 발표했다.[56]

1969년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경기에서 찰턴이 요한 크루이프에게 태클을 걸고 있다.


찰턴이 30세가 되면서, 알프 램지는 1965년 4월 10일 웸블리에서 열린 스코틀랜드와 경기에 잉글랜드 대표로 찰턴을 소집했다.[58] 잉글랜드는 2–2로 경기를 마쳤다; 그는 잉글랜드 첫 골을 형 보비에게 어시스트했다.[59] 램지는 찰턴을 보비 무어와 함께 뛰도록 선택했는데, 무어보다 보수적인 선수여서 무어가 실수할 경우 대비하여 커버할 수 있었다.[60] 수비는 1966년 FIFA 월드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고든 뱅크스 (골키퍼), 레이 윌슨 (레프트 백), 찰턴과 무어 (센터 백), 조지 코헨 (라이트 백).[61] 다음 달 헝가리를 1–0으로 이긴 후, 찰턴은 잉글랜드와 함께 유럽 투어에 참가하여 유고슬라비아와 1–1로 비기고 서독을 1–0으로, 스웨덴을 2–1로 이겼다.[62] 웨일스와 0–0 무승부, 북아일랜드를 2–1로 이기면서 영국 홈 챔피언십 우승에 기여했다. 이 두 경기 사이에 오스트리아에 3–2로 패했는데, 잉글랜드 유니폼을 입고 패배한 두 번의 경우 중 첫 번째였다.[63] 1965년에 9번의 잉글랜드 경기에 모두 출전했는데, 마지막 경기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스타디움에서 스페인을 2–0으로 이긴 경기였다.[63]

잉글랜드는 1966년 1월 5일 구디슨 파크에서 폴란드와 1–1로 비기면서 1966년을 시작했다.[64] 찰턴은 잉글랜드가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다음 7번의 국제 경기 중 6번을 승리하는 데 출전했다. 6월 26일 헬싱키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핀란드를 3–0으로 이긴 경기에서 굴절된 슛으로 자신의 첫 번째 국제 골을 기록했다.[65] 노르웨이와 경기에 결장했지만 이드라트파르켄에서 덴마크를 2–0으로 이긴 경기에서 헤딩 골을 넣으며 복귀했다.[65]

잉글랜드는 우루과이와 월드컵 조별 예선 첫 경기에서 0–0으로 비겼다.[66] 멕시코를 2–0으로 이겼다.[67]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프랑스를 2–0으로 이겼는데, 찰턴은 헤딩으로 볼을 골대에 맞춘 후 로저 헌트를 어시스트했다.[67]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를 1–0으로 꺾었다.[68] 준결승 상대는 포르투갈이었고, 조제 토레스와 공중 볼을 다투었다.[69] 경기 후반, 찰턴은 토레스 득점을 막기 위해 손을 뻗어 페널티킥을 헌납했다; 에우제비우가 페널티킥을 성공시켰지만, 잉글랜드는 보비 찰턴의 두 골로 2–1로 승리했다.[69]

결승전은 웸블리에서 서독과 치러졌고, 서독은 12분에 헬무트 할러 골로 앞서 나갔다.[70] 잉글랜드는 반격하여 리드를 잡았지만, 경기 종료 몇 분 전에 찰턴은 공중 볼을 다투다 우베 젤러에게 반칙을 범하여 프리킥을 헌납했고; 볼프강 베버는 프리킥으로 인해 발생한 문전 혼전에서 동점 골을 넣었다.[71] 제프 허스트는 연장전에서 두 골을 넣어 4–2로 승리했다.[72]

월드컵 이후 잉글랜드는 1967년 4월 3–2로 패하며 스코틀랜드에 연례 홈 챔피언십을 내주었다. 찰턴은 전년도 11월 웨일스전에서 골을 넣은 데 이어 2경기 연속 국제 경기에서 득점했다.[36] 경기 도중 발 부상을 입어 발가락 뼈 두 개를 골절했다.[73] 경력이 진행되면서 리즈를 위해 중요한 경기를 치르기 위해 친선 경기를 피하고 싶어 잉글랜드 경기에 결장하기 시작했다.[74] UEFA 유로 1968 대표팀에 이름을 올렸지만, 잉글랜드 두 경기 모두 출전하지 않았다. 1969년에 5번 출전했고,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5–0으로 이기는 승리를 거두었으며, 형 보비가 코너킥을 올려준 포르투갈전에서 1–0으로 승리하며 득점했다.[74]

1970년 중반, 램지는 1970년 월드컵 멕시코 대표팀 22인 명단에 찰턴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브라이언 라본을 선호했고, 찰턴은 에스타디오 할리스코에서 열린 체코슬로바키아와 조별 예선 1–0 승리에서 35번째이자 마지막 잉글랜드 경기에만 출전했다. 잉글랜드는 8강전에서 서독에 패했고, 귀국 비행기에서 찰턴은 램지에게 다시는 국제 경기를 고려하지 말라고 요청했다. "멋진 시절 ... 정말 영광이었어요 ... 나이가 들고 ... 속도가 느려지고 ... 더 이상 감당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들어요 ... 이제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아요." 램지는 동의했다: "그래, 나도 그런 결론에 도달했지."[75]

잭 찰턴은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센터백으로 활약했다.

리즈에서는 돈 레비 감독 아래 빌리 브렘너 등과 함께 풋볼 리그 우승 1회(1969년), FA컵 우승 1회(1973년), 풋볼 리그 컵 우승 1회(1968년), 인터시티스 페어스컵(UEFA컵 전신) 우승 2회(1968년, 1971년) 등에 기여했으며, 1973년 은퇴했다. 1967년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잉글랜드 대표팀으로 1965년 대표팀 데뷔, 30세 늦깎이 데뷔였지만, 1966년 1966년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대회에서 형제와 함께 레귤러로 활약하며 우승에 기여했다. 1970년 1970년 FIFA 월드컵 멕시코 대회를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2. 1. 클럽 경력

1935년 5월 8일, 잉글랜드 노섬벌랜드주 애싱턴에서 태어난 잭 찰턴은 광부였던 아버지와 축구를 좋아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4형제 중 장남으로 자랐다.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축구에 대한 열정을 키웠고, 15세에 리즈 유나이티드의 테스트를 제안받았으나 거절하고 광부로 일하다가 경찰 입대를 준비하던 중 리즈의 제안을 다시 받아들여 1952년 리즈 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10][11][12][13]

찰턴은 리즈 유나이티드에서만 21년간 활약하며, 1963-64 시즌 2부 리그 우승, 1968-69 시즌 1부 리그 우승, 1971-72 시즌 FA컵 우승, 1967-68 시즌과 1970-71 시즌 인터시티스 페어스컵 우승 등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29] 특히 돈 레비 감독 하에서 노먼 헌터와 함께 강력한 수비 라인을 구축하며 리즈의 성공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29] 1967년에는 잉글랜드 축구 기자 협회(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73] 1972-73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총 762경기에 출전하여 95골을 기록했다.[56]

클럽별, 시즌별 및 대회별 출전 및 득점[185]
클럽시즌리그FA컵유럽합계
디비전출전득점출전득점출전득점출전득점
리즈 유나이티드1952-53세컨드 디비전10000010
1953-54세컨드 디비전00000000
1954-55세컨드 디비전10000010
1955-56세컨드 디비전3400000340
1956-57퍼스트 디비전2101000220
1957-58퍼스트 디비전4001000410
1958-59퍼스트 디비전3911000401
1959-60퍼스트 디비전4131000423
1960-61세컨드 디비전4174100458
1961-62세컨드 디비전34953003912
1962-63세컨드 디비전3824200424
1963-64세컨드 디비전2532000273
1964-65퍼스트 디비전399101004910
1965-66퍼스트 디비전40630112548
1966-67퍼스트 디비전28510270457
1967-68퍼스트 디비전34592111548
1968-69퍼스트 디비전4134074527
1969-70퍼스트 디비전323112103538
1970-71퍼스트 디비전4165000466
1971-72퍼스트 디비전4159100506
1972-73퍼스트 디비전1835120254
통산629708515481076295


2. 2. 국가대표 경력

잭 찰턴은 30세의 늦은 나이로 1965년 잉글랜드 대표팀에 데뷔했다.[186] 이듬해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동생 보비 찰턴과 함께 잉글랜드의 우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70년 1970년 FIFA 월드컵을 끝으로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할 때까지 A매치 35경기에 출전하여 6골을 기록했다.[186]

국가대표팀별 출장 및 득점 (연도별)[186]
국가대표팀연도출장득점
잉글랜드196590
1966163
196721
196810
196952
197020
합계356



잭 찰턴의 국제 경기 득점 목록[187]
날짜경기장상대득점결과대회
11966년 6월 26일헬싱키 올림픽 스타디움, 헬싱키, 핀란드3–03–0친선 경기
21966년 7월 3일코펜하겐 이드렛스파크, 코펜하겐, 덴마크1–02–0친선 경기
31966년 11월 16일웸블리 스타디움, 런던, 잉글랜드5–15–11966–67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41967년 4월 15일웸블리 스타디움, 런던, 잉글랜드1–22–31966–67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51969년 1월 15일웸블리 스타디움, 런던, 잉글랜드1–01–1친선 경기
61969년 12월 10일웸블리 스타디움, 런던, 잉글랜드1–01–0친선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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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감독 경력

잭 찰턴은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었다. 1973년 미들즈브러 감독으로 취임한 후, 셰필드 웬즈데이, 뉴캐슬 유나이티드 감독을 역임했다. 미들즈브러셰필드 웬즈데이에서 팀을 리그 승격으로 이끌었으며, 특히 미들즈브러에서는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뉴캐슬에서는 폴 개스코인과 같은 유망주를 육성하며 팀의 미래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 1986년에는 아일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찰턴의 지도 아래, 그 전까지 유럽에서도 약소국으로 분류되던 아일랜드는 유럽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본 대회에서는 첫 경기에서 잉글랜드를 1-0으로 꺾고, 소련과 1-1로 비겼으며, 네덜란드와 접전을 벌이는 등 돌풍을 일으켰다.

FIFA 월드컵에서도 1990년 FIFA 월드컵 이탈리아와 1994년 FIFA 월드컵 미국에 2회 연속 출전을 이끌었다. 이탈리아 대회에서는 8강, 미국 대회에서는 1차 리그 첫 경기에서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16강에 진출했다.

UEFA 유로 1996 예선에서 탈락하자 감독직에서 사임했고, 동시에 감독직에서도 은퇴했다.

3. 1. 미들즈브러

찰턴은 1973년 자신의 38번째 생일에 2부 리그 클럽 미들즈브러의 감독직 제안을 받았다. 그는 면접을 거절하고 구단 운영에 대한 전적인 권한을 요구했고, 이는 그가 동의할 경우 모든 권한을 갖는다는 의미였다.[76] 그는 계약을 거절했으며, 감독 경력 동안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다.[77] 그는 연봉 10000GBP를 받았으며, 그의 유일한 조건은 해고되지 않겠다는 신사 협정, 구단에서 팀 운영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보장, 그리고 낚시와 사격을 위한 주 3일 휴가였다.[78]

찰턴은 셀틱의 감독 조크 스타인의 조언을 받아 바비 머독을 자유 계약으로 영입했다.[80] 머독 외에도 찰턴은 이미 챔피언십 우승팀으로 만들 10명의 선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포지션선수
골키퍼짐 플랫
오른쪽 수비수존 크래그스
센터백스튜어트 보암, 윌리 매드런
왼쪽 수비수프랭크 스프래건
왼쪽 미드필더데이비드 암스트롱
중앙 미드필더그라임 소네스
공격형 미드필더앨런 포건
공격수존 힉턴, 데이비드 밀스



찰턴은 소네스의 속도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그의 포지션을 변경하고, 포건에게는 상대 수비수들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깨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81][82]

미들즈브러는 1973–74 시즌 7경기를 남겨두고 승격을 확정지었고, 15점 차이로 우승했다(당시 승리 시 2점만 부여).[83] 찰턴은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으며, 이는 최상위 리그가 아닌 감독에게 처음으로 수여된 영예였다.[84]

1974–75 시즌, 미들즈브러는 7위로 마쳤지만, 유럽 진출 자격을 얻을 수도 있었다.[86]

1975–76 시즌, 미들즈브러는 13위로 마쳤지만, 앵글로-스코틀랜드 컵에서 풀럼을 1-0으로 이기며 우승했다.[86] 또한 리그 컵 준결승에 진출했지만, 맨체스터 시티에게 패했다.[86]

팀들이 찰턴의 전략에 대한 파훼법을 찾기 시작했고, 1976년 7월, 클럽 이사회는 찰턴을 해고하기로 투표했지만, 클럽 회장은 이 결정을 무효화했다.[87][88]

1976–77 시즌, 미들즈브러는 12위로 마쳤고, 찰턴은 4년이 한 선수단과 함께 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며, 그들과 함께 정점에 도달했다고 믿고 시즌 말에 클럽을 떠났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며, 만약 그가 머물면서 두 명의 최고 수준의 선수를 더 영입했다면 클럽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89]

1984년 3월, 찰턴은 1983–84 시즌 말까지 미들즈브러를 맡아 클럽이 2부 리그 강등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왔다.[102] 그는 경비 외에는 무보수로 일했고, 클럽 회장이었던 친구를 위해 호의로 이 직책을 맡았다.[102] 미들즈브러는 시즌을 17위로 마쳤다.[103]

3. 2. 셰필드 웬즈데이

찰턴은 1977년에 셰필드 웬즈데이 감독으로 부임했다.[89] 1979-80 시즌, 셰필드 웬즈데이를 3부 리그 3위로 이끌며 2부 리그로 승격시켰다.[89] 1983년, 찰턴은 셰필드 웬즈데이 감독직에서 물러났다.[89]

3. 3. 뉴캐슬 유나이티드

1984년, 찰턴은 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찰턴은 뉴캐슬에서 폴 개스코인과 같은 유망주를 육성하며 팀의 미래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110] 1985년, 찰턴은 뉴캐슬 유나이티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110]

3. 4. 아일랜드 공화국

찰턴은 1986년에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116] 그 전까지 유럽에서도 약소국으로 분류되던 아일랜드를 이끌고 1988년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본선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예선에서 아일랜드는 벨기에, 불가리아, 룩셈부르크, 스코틀랜드와 같은 조에 속했다.[116] 벨기에와 두 번의 무승부를 거두고,[116][118] 스코틀랜드와의 홈 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햄던 파크에서 열린 원정 경기에서는 마크 로렌슨의 골로 1-0 승리를 거두었다.[117] 불가리아 원정에서 2-1로 패하기도 했지만,[118] 룩셈부르크를 상대로 두 번 모두 승리하고,[119] 불가리아와의 홈 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두며,[119][120] 스코틀랜드가 불가리아를 1-0으로 꺾는 도움[119] 속에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서독에서 열린 유로 1988 본선에서 아일랜드는 첫 경기에서 잉글랜드를 레이 호튼의 골로 1-0으로 꺾는 이변을 일으켰다.[124] 소련과의 두 번째 경기에서도 로니 휠란의 골로 1-1 무승부를 기록하며 선전했지만,[125] 네덜란드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빔 키프트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1-0으로 패해 아쉽게 탈락했다.[126]

1990년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는 8강, 1994년 FIFA 월드컵 미국에서는 16강에 진출했다.[119] 특히 1994년 미국 월드컵 1차 리그 첫 경기에서는 우승 후보였던 이탈리아를 1-0으로 꺾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찰턴은 UEFA 유로 1996 예선에서 탈락한 후 1996년에 아일랜드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나며 감독 경력을 마감했다.

4. 수상 내역

리즈 유나이티드
풋볼 리그1968-69[42]
풋볼 리그 2부1963-64[29]
FA컵1971-72;[55] 준우승: 1964-65,[190] 1969-70[191]
풋볼 리그 컵1967-68[40]
FA 채리티 실드1969[44]
인터 시티스 페어스 컵1967-68, 1970-71[41][53]
잉글랜드
FIFA 월드컵1966[72]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3위: 1968[74]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1964-65, 1965-66, 1967-68, 1968-69[192]
개인
FUWO 유럽 시즌의 팀1966,[193] 1967[194]
FWA 올해의 축구 선수1967[73]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2005[172]
PFA 세기의 팀 (1907–1976)2007[195]
미들즈브러
풋볼 리그 2부 우승1973–74[83]
앵글로-스코티시 컵 우승1975–76[86]
셰필드 웬즈데이
풋볼 리그 3부 3위 승격1979–80[98]
아일랜드 공화국
아이슬란드 삼각 토너먼트 우승1986[113]
개인
잉글랜드 올해의 감독1974[84]
필립스 스포츠 올해의 감독1987, 1988, 1989, 1993[196]


4. 1. 선수

잭 찰턴은 1952년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친동생 바비가 공격적인 포지션에서 뛰며 항상 각광을 받았던 것에 반해, 형 잭키는 장신을 활용한 센터백으로 활약했다.

리즈에서는 돈 레비 감독 아래에서 빌리 브렘너 등과 함께 풋볼 리그 우승 1회(1969년), FA컵 우승 1회(1973년), 풋볼 리그 컵 우승 1회(1968년), 인터시티스 페어스컵(UEFA컵의 전신) 우승 2회(1968년, 1971년) 등에 기여했으며, 1973년에 현역에서 은퇴할 때까지 일관되게 리즈를 위해 뛰었다. 또한 1967년에는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잉글랜드 대표팀으로는 1965년에 대표팀 데뷔. 30세로 늦깎이 데뷔였지만, 이듬해인 1966년 1966년 FIFA 월드컵 잉글랜드 대회에서는 형제가 함께 레귤러로 활약하며 우승에 기여했다. 1970년 1970년 FIFA 월드컵 멕시코 대회를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할 때까지 국제 A매치 35경기에 출전하여 6골을 기록했다.

수상
리즈 유나이티드
풋볼 리그1969년
FA컵1973년
풋볼 리그 컵1968년
인터시티스 페어스컵1968년, 1971년
잉글랜드
1966년 FIFA 월드컵우승
개인
FWA 올해의 선수상1967년
대영 제국 훈장 4등급1974년[199]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2005년


4. 2. 감독

1973년, 잭 찰턴은 38번째 생일에 세컨드 디비전 클럽 미들즈브러의 감독직 제안을 받았다. 그는 면접을 거절하고 대신 클럽 운영에 대한 전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책임을 적은 목록을 구단에 제출했는데, 이는 그가 동의할 경우 모든 권한을 갖는다는 의미였다.[76] 그는 계약을 거절했으며, 그의 감독 경력 동안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다.[77] 회장이 훨씬 더 많은 금액을 지불할 의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봉 10000GBP을 받았다. 그의 유일한 조건은 해고되지 않겠다는 신사 협정, 구단에서 팀 운영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보장, 그리고 낚시와 사격을 위한 주 3일 휴가였다.[78]

찰턴은 셀틱의 감독 조크 스타인의 조언을 받아 그로부터 오른쪽 미드필더 바비 머독을 자유 계약으로 영입할 수 있었다.[80] 머독 외에도 찰턴은 이미 챔피언십 우승팀으로 만들 10명의 선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짐 플랫(골키퍼), 존 크래그스 (오른쪽 수비수), 스튜어트 보암과 윌리 매드런 (센터백), 프랭크 스프래건 (왼쪽 수비수), 데이비드 암스트롱 (왼쪽 미드필드), 그라임 소네스 (중앙 미드필드), 앨런 포건 (공격형 미드필드), 존 힉턴과 데이비드 밀스 (공격수)였다. 찰턴은 소네스의 속도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왼쪽 미드필드에서 중앙 미드필드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그의 본능과는 달리 공을 옆으로가 아닌 앞으로 패스하도록 훈련시켰다.[81] 포건은 찰턴이 상대 수비수들의 오프사이드 트랩을 깨기 위해 만든 새로운 역할에서 뛰었다. 그는 매우 빠른 선수였고 수비수 뒤로 달려가 롱볼을 받아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을 만들도록 지시받았다.[82]

미들즈브러는 1973–74 시즌 7경기를 남겨두고 승격을 확정지었고, 찰턴은 그의 팀에게 루턴 타운 원정에서 승점 1점을 확보하여 홈에서 우승을 결정하도록 지시했지만, 그의 선수들은 골을 내주라는 그의 지시를 무시했고, 케닐워스 로드에서 1–0으로 승리하며 우승을 확정했다.[83] 그들은 15점 차이로 우승했다(당시 승리 시 2점만 부여). 그는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으며, 이는 최상위 리그가 아닌 감독에게 처음으로 수여된 영예였다.[84]

그는 클럽의 스카우트 네트워크를 해체하고 노섬벌랜드와 더럼의 지역 재능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85] 1974–75 시즌의 유일한 주요 신규 영입은 전 리즈 유나이티드 팀 동료인 테리 쿠퍼였다.[85] 그들은 1부 리그에 잘 적응하여 7위로 마쳤지만, 더비 카운티가 시즌 마지막 날 그들을 상대로 종료 직전 골을 넣지 않았다면 4위로 마쳐 유럽 진출 자격을 얻었을 것이다.[86]

1975–76 캠페인을 준비하면서 그는 머독을 대체하기 위해 리버풀에서 필 보어스마를 영입했지만, 보어스마는 클럽에 정착하지 못하고 자주 부상을 당했다.[86] 그들은 13위로 시즌을 마쳤고, 앵글로-스코틀랜드 컵에서 풀럼을 1–0으로 이기며 우승했다.[86] 또한 리그 컵 준결승에 진출하여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메인 로드에서 열린 2차전에서 4–0으로 완패하기 전 1–0으로 앞섰다.[86] 팀들은 찰턴의 공격 전략에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들은 포건의 위협을 무력화하기 위해 페널티 박스 밖에 센터백을 배치했다.[87] 팀의 꾸준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클럽 이사회는 1976년 7월, 그가 클럽을 대신하여 사업 거래를 협상하고 클럽 유니폼을 선택하는 데 있어 권한을 넘어서고 있다고 점점 더 우려하여 찰턴을 해고하기로 투표했다.[88] 클럽 회장은 이 결정을 무효화했고, 찰턴은 계속 지휘했다.[88]

힉턴이 선수 생활의 말년에 접어들면서 찰턴은 데이비드 크로스를 그의 대체 선수로 영입하려 했지만 80000GBP 이상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했고, 크로스는 대신 120000GBP에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89] 미들즈브러는 1976–77 캠페인을 12위로 마쳤고, 찰턴은 4년이 한 선수단과 함께 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며, 그들과 함께 정점에 도달했다고 믿고 시즌 말에 클럽을 떠났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 그는 만약 그가 머물면서 두 명의 최고 수준의 선수를 더 영입했다면 클럽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89] 그는 돈 레비가 사임하고 브라이언 클러프잉글랜드 축구 협회에 의해 배제된 후 잉글랜드 감독직에 지원했다. 찰턴은 그의 지원서에 대한 답변을 받지 못했고, 다시는 다른 직책에 지원하지 않고 대신 제안이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맹세했다.[90]

은퇴 후 지도자의 길을 걸어 1973년부터 미들즈브러의 감독으로 취임한 후, 셰필드 웬즈데이뉴캐슬 유나이티드의 감독을 역임했다. 1986년에는 아일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했다.

찰턴의 지도 아래, 그 전까지 유럽에서도 약소국으로 분류되던 아일랜드는 착실하게 실력을 키워 1988년 유럽 선수권 대회 예선을 통과하여, 유럽 선수권 대회에 출전했다. 본 대회에서는 첫 경기에서 잉글랜드를 1-0으로 꺾고, 제2전에서는 소련과 1-1로 비겼으며, 제3전에서는 이 대회를 제패한 네덜란드와 접전을 벌이는 등 돌풍을 일으켰다.

FIFA 월드컵에서도 1990년 FIFA 월드컵 이탈리아와 1994년 FIFA 월드컵 미국에 2회 연속 출전을 이끌었다. 이탈리아 대회에서는 8강, 미국 대회에서는 1차 리그 첫 경기에서 우승 후보였던 이탈리아를 1-0으로 꺾고, 최종적으로 16강 진출을 이끄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 후, UEFA 유로 1996 예선에서 탈락하자 감독직에서 사임했고, 동시에 감독직에서도 은퇴했다.

5. 사생활

잭 찰턴은 1958년 1월 6일 팻 켐프와 결혼했으며, 그의 형제 바비가 신랑 들러리를 섰다.[22] 슬하에 세 자녀를 두었는데, 1959년 1월에 태어난 존, 1961년에 태어난 데보라, 그리고 1966년 1966년 FIFA 월드컵 결승전 직후에 태어난 피터이다. 1960년대에 그는 리즈에서 두 개의 옷 가게를 운영했고, 나중에는 엘런드 로드의 클럽 상점을 운영했다.[162]

찰턴은 열렬한 낚시꾼이었으며 야외 스포츠에도 관심이 많았다.[163]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였으며,[164] 반 나치 연맹의 창립 지지자였다.[165] 그는 아내와 함께 1984-85년 영국 광부 파업을 지지했으며, 파업에 참여하는 광부들이 피켓 라인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자신의 차 두 대를 빌려주었다.[166] 1972년과 1996년 ''사막 섬 디스크''에 출연하여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 "생존 방법 백과사전", 망원경, 그리고 낚싯대를 가져가는 것을 선택했다.[167][168]

1996년, 명예 아일랜드 시민권을 받았다. 이는 아일랜드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이다.[169]

찰턴은 림프종치매를 앓은 후 2020년 7월 10일 노섬벌랜드 애싱턴 자택에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8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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